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의 차이



대한민국은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에 따라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것보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부모를 부양하는 일을 더 중요시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이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보다 부모가 아이를 양육해야 할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을 양육했으니 당연히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게 맞는 수순이라 생각한다. 아이를 책임지지 않는 부모와 부모를 책임지지 않는 자식은 어떤차이가 있을까. 나는 말했듯이 부모가 자식을 양육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를 부양해야하는 것은 선택이라고 본다. 성인이 된 자식은 부모를 부양 할 수도 있고 혹은 그렇치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첫번째, 자식은 자신이 선택해서 세상에 나오게 된 존재가 아니다. 어떤 형제, 어떤 부모, 어떤 나라, 어떤 환경 등을 선택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를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말로 대신한다. 오히려 부모가 주신 몸이니 부모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로 쓰일 때도 있다. 본인 스스로 얻은 몸이 아니라 부모가 주신 몸이라는 소리다. 현재 민주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인간은 인격체로서 인권이 있으며 주체가 있고 의무를 지고 권리를 주장해야한다고 배운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말이 통하는 시대인가?


반대로 부모의 상황은 다르다. 자식의 수, 자식의 성별, 자식의 환경, 자식의 나라까지 부모는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조금은 있다. 계획적으로 낳은 것이 아니고 어쩌다가 생긴 것이며, 계획적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책임 회피에 불가하다. 자식은 본인 스스로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고, 부모는 최소한의 선택이라도 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것이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만약 부모를 부양해야하는 것이 도리로써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의무라면 적어도 자식은 조금의 어떤 선택으로라도 태어남에 있어 부모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권리에 따른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식은 권리를 행한 것이 없는데 의무로 주어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 된다. 자식에게 권리는 없고 의무만을 강조하는 행태와 부모에게 권리만을 주고 의무를 주지 않는 행태는 상당히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법개정에 대해서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이 권리라는 것은 부부가 이혼했을 때 그 양상이 더 크게 나타난다. 자식을 양육함에 있어 부모의 양육권에 따른 양육비 지급이 미비하다.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났어도 법적인 강제는 없다. 아이를 낳을 권리를 가졌지만 의무는 질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또한 부모는 의무를 질 필요없이 자식을 고아원에 버릴 수 있지만 자식은 의무를 져야하므로 부모를 버릴 수 없다. 자식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태어나 권리를 하나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의무만 질뿐이다. 부모는 원하지 않는 자식, 필요 없는 자식, 계획적인 자식이 아닌 경우 고아원, 즉 나라에 맡겨 나라가 대신 책임지게 할 수 있지만, 자식은 원하지 않는 부모, 필요 없는 부모, 이상적이지 않는 부모를 나라에 맡길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아는 양로원은 나라가 부모를 책임져주는게 아니라 결국 자식이 대가(돈)를 지불하고, 부모가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는 것처럼 부모를 맡겨만 두는 곳이다. 부모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식을 나라(고아원)에 버릴 수 있다. 자식은 경제적인 어려움만으로 부모를 나라에 버릴 수가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한민국은 부모가 자식을 회피하는 것에는 무디면서 자식이 부모를 회피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반기를 드는 이상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두번째, 보상관계가 거론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그만큼 해줘야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에게 제대로 못해주고 학대와 차별을 받고 상처만 가득한 상태로 자란 자식은 훗날 부모도 그만큼 해줬으니 본인도 부모를 학대와 차별로써 대하겠다 하면 이건 말이 되는가? 이렇듯,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줘라 하는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이었는지 뒤집어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도대체 누군가와 비교해서 자신이 이만큼 잘해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자식은 또 누군가와 비교해 내 부모가 이만큼 잘해줬다고 좋아해야할까. 나중에 자식이 부모를 부양해야할 때도 그 누군가와 비교해서 그만큼만 잘해줘야 하는 것인가. 양육의 의무와 부양의 의무를 수치로 측정하여 매길 수 있는 것인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의 가치를 단순히 돈으로만 측정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라면 오히려 자식에게 독이므로 차라리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이 좋다.


세번째, 자식이 부모를 어떤 심정으로 견뎠을지를 생각해보라.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어떤 심정으로 키웠을지 생각해봤다면 그 자식이 자신의 부모 밑에서 무엇을 견뎠고, 무엇을 어려워 했고, 무엇을 속으로 삭혔을지 생각해 본 적있는가. 자식도 부모의 자식이기 전에 사람이며 인간이다. 스스로 인격체가 있고 어떤 환경에 놓이면 그걸 견디기 위해 수많은 사고(思考)를 한다. 부모만 자식을 키우며 어떤걸 견디는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의 밑에서 자라며 각기 다른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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